케이블 릴리즈(Threaded Cable Release)

2023. 11. 28. 09:28Chat : 아무 이야기

사진을 찍다 보면 카메라, 렌즈, 필름 혹은 메모리카드 같은 필수 촬영 장비들 외 여러 가지 자잘한 액세서리들이 필요해지기 마련이다. 다양한 사이즈의 필터 업다운 링 아답터, 삼각대용 각종 플레이트들, 청소 도구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물건들을 구입, 소모(또는 분실)하고 다시 재구매하는 과정을 반복하곤 한다. 그중 구형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다 보면, 특히 장노출이나 야간 사진을 자주 찍는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구입하게 되는 액세서리 중 하나가 기계식 케이블 릴리즈가 아닐까 한다.

 

나는 원래 2개의 기계식 케이블 릴리즈를 가지고 있었는데 20년도 훨씬전에 B&H에서 구입한 Gepe Metal Weave Covered Cable Release With Disc-LockGepe Cloth Covered Cable Release with T-Lock이 그것들이다. 이 중 Gepe Metal Weave Covered Cable Release With Disc-Lock을 거의 메인으로 써왔는데 이유는 그냥 Disc-Lock 방식이 나는 더 편해서였다. 물론 T-Lock 케이블 릴리즈가 셔터를 더 확실하게 고정시킬 수 있어 혹시 모를 흔들림에 보다 안전하고 구조도 단순해 고장 날 우려가 적어 보인다는 장점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셔터 고정 시 양손을 다 써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Disc-Lock 케이블 릴리즈 방식을 개인적으로는 선호하는 편이다.

 

아무튼 그렇게 오랫동안 사용하던 이 Gepe Metal Weave Covered Cable Release With Disc-Lock을 지난달 여행 도중 그만 분실해 버렸다. 같은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국내 판매처를 도저히 찾을 수 없어 B&H에 직구를 해야 했는데 배송 기간과 운송료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그냥 쿠팡에서 파는 저렴한(대략 8000원 정도) 기계식 케이블 릴리즈(아마도 중국산인 듯)를 주문했다. 뭐 케이블 릴리즈가 어차피 다 똑같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 만에 배송된 이 저렴이 케이블 릴리즈는 사실 기본적인 작동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사용하던  Gepe 브랜드 제품에 비해 전체적인 퀄리티가 매우 떨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케이블을 감싸고 있는 PVC 소재는 부드럽지 못하고 너무 뻣뻣해 감촉이 좋지 못했고 가장 중요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릴리즈 버튼과 디스크락의 작동도 매끄럽지 못하고 어딘가 거칠게 동작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카메라 셔터가 망가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괜한 노파심마저 들었다. 

 

결국 B&H에 새로 주문을 넣었다. 분실을 대비해 기존 사용하던 Gepe Metal Weave Covered Cable Release With Disc-Lock 외 Gepe PVC Pro Threaded Cable Release with Disc Lock(Red)를 추가로 구입했다. 그렇게 받아든 Gepe 케이블 릴리즈들은 20년 전 내가 구입했던 제품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잘 작동했고 아주 만족스럽다.(같은 제품을 아직도 만들어 판다는 것이 신기하다.)

 

35mm 필름용 Gepe 안티 뉴턴 유리 슬라이드 마운트

Gepe는 현재는 거의 쓰지 않는 슬라이드 영사기(일명 환등기)의 체인저(슬라이드 매거진?)를 제조하던 스웨덴에서 1955년 설립된 회사로 알고 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Gepe의 히트 상품인 A-Slide Mount를 개발 출시하면서부터였는데 플라스틱 사출을 통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다양한 포맷의 필름용 슬라이드 마운트들을 생산해냄으로써 이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회사를 더욱 확장해 여러 가지 사진 관련 기자재들을 한때 생산하기도 했다.

 

핫셀블라드 X-Pan용 Gepe 안티 뉴턴 유리 슬라이드 마운트

특히 안티 뉴턴 유리를 채용한 슬라이드 필름 마운트는 외부로부터의 오염을 효과적으로 막아주어 필름을 손상 없이 장기간 보관하기 매우 용이하여 많은 전문 사진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었다. 나 역시 이 슬라이드 마운트를 구입해 A컷으로 분류된 필름들을 별도로 보관하곤 했었는데 그 정교한 만듦새와 우수한 디자인에 감탄하곤 헸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면서 Gepe도 결국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사진 관련 제품들의 생산을 중단하고 관련 회사들도 팔아버린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북미 시장에서 Gepe란 이름을 달고 판매하는 케이블 릴리즈들은 아마 그 상표만 사용하고 실제 생산은 라이카린호프등에 케이블 릴리즈를 OEM으로 납품하는 Gebr. Schreck이라는 독일 회사에서 생산하는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든다.(그냥 내 생각일 뿐 사실인지 확실하지 않다.)

  

사실 몇 천 원 정도로 충분히 구할 수 있는 단순한 기계식 케이블 릴리즈 하나를 굳이 몇 배가 넘는 금액을 지불하여 해외구매까지 해가며 써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그래봐야 아주 비싼 비용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한번 구입하면 분실하지 않는 이상 거의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 이왕이면 처음부터 제대로 된 것을 구입해 오래오래 잘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한다.

 

요즘은 카메라에 블루투스나 무선 주파수등을 통해 연결하는 전자식 릴리즈(혹은 아예 스마트폰이 그 기능을 대신하는...)가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향후 몇십 년 혹은 몇 년 후 이런 기계식 케이블 릴리즈들은 더 이상 신품으로 구입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슬픈 생각이 들어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몇 개쯤은 더 추가 구입해 쟁여두고 싶은 마음도 든다.